[공천혁명, 선진 사례에서 배우자-중] 英 '물갈이' 대신 예비후보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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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편집시간 : 2019년 11월 14일 20:12:06
    [공천혁명, 선진 사례에서 배우자-중] 英 '물갈이' 대신 예비후보 양성
    국회의원의 역사가 정당의 역사보다 긴 영국
    공천권 휘둘러 '인위적 물갈이'는 상상 불가
    낙선하거나 스스로 재선 포기해야 공천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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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19-10-20 03:00
    정도원 기자(united97@dailian.co.kr)
    국회의원의 역사가 정당의 역사보다 긴 영국
    공천권 휘둘러 '인위적 물갈이'는 상상 불가
    낙선하거나 스스로 재선 포기해야 공천 돌입


    찍어내기·칼바람·물갈이·살생부·학살·수술대·표적·배제·사천(私薦)·밀실·거수기·외압·항명·불복… 총선만 다가오면 살벌하고 흉흉한 단어들이 여의도를 뒤흔들고 신문과 방송을 장식한다.

    총선을 치를 때마다 초선 의원 비율이 40%에 달할 정도로 끊임없이 '고기갈이'를 해댔지만, 우리 정치는 제자리걸음 내지는 퇴보라는 평이다. '고기' 공직후보자보다도 '물' 공직후보자 공천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데일리안은 총선을 반 년 앞두고 미국·영국· 독일 등 선진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천제도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살펴보는 순서를 마련했다.

    ▲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보수당 총재 경선을 뛰고 있던 지난 6월 맨체스터에 도착해 전당대회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영국은 국회의원이 국정운영의 중심이 되는 의원내각제 국가다. 또, 국회의원의 역사가 정당의 역사보다 길 정도로 유구한 의회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의회는 1066년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해 '정복왕'으로 즉위한 뒤, 봉건제후와 성직주교 등을 모아 창설한 자문기구 '쿠리아 레기스(Curia Regis)'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

    국왕의 자문기구에 불과했던 '쿠리아 레기스'는 1215년 존 왕이 승인한 대헌장에 새로운 조세 신설의 동의권이 규정되면서 의회 성격으로 발전했다. 1265년 헨리 3세가 각 군(郡)에서 귀족 2인, 각 시(市)에서 자유시민 2인을 대표자로 선출·소집하도록 하면서, 의회는 귀족원과 서민원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 시절부터 별도 장소에서 회의를 열기 시작하면서 귀족원과 서민원의 분립은 결정적인 것이 됐다.

    당초에는 귀족원의 권한이 압도적이었으며, 서민원은 '청원자'에 불과했다. 서민원에서 의결이 이뤄지면, 의장이 귀족원으로 가서 국왕과 귀족원 의원들 앞에서 서민원의 의결사항을 낭독하고 고려해달라고 읍소하는데서 국회의장을 'Speaker'라고 부르는 전통이 시작됐다.

    그런데 1407년 헨리 4세 때 실질적인 납세자들로 구성된 서민원이 대헌장에 규정된 조세 동의권을 가져오면서 양원의 역학 관계가 뒤집혔다. 귀족원은 이후 탄핵심판권이나 재판권·종교관계 등의 역할을 강화하면서 양원은 기능적으로도 분화했다.

    근대 정당으로서 토리당(보수당의 전신)과 휘그당(자유민주당의 원류)은 찰스 2세 때인 1678~1681년 무렵 요크공 제임스의 왕위계승문제를 놓고 형성되기 시작해, 1710년 총선과 1715년 총선에서 정권교체의 문화를 확립했기 때문에, 국회의원의 존재가 정당의 존재보다 적어도 500년 이상 선행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정당의 지도부가 당론을 소속 국회의원에게 강요하거나, 공천권 등을 행사해 배제·찍어내기·학살 등 '인위적 물갈이'는 영국의 의회주의 전통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지적이다.

    이런 문화가 브렉시트를 둘러싼 대혼란 등 부작용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헌법기관이자 국민의 대의대표로서 국회의원 기능에는 그 어느 나라보다 충실하다는 평이다.

    영국의 귀족원은 세습귀족·당대귀족·법복귀족·성직주교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서민원에 실질적인 권한이 있고 '공천'도 서민원에서 제대로 이뤄진다.

    훌륭한 정치예비군 확보 위해 매해 공모 실시
    당협 면접 이후 중앙당에 제출, 명부로 보관
    '물갈이' 급급, 급조 수혈하는 우리와 대조적


    ▲ 브렉시트 논의 과정에서 보수당 소속 국회의원이 탈당해 노동당에 동조한 지난달, 서민원 의사당 앞에서 브렉시트를 지지하고 반대하는 국민들이 각각 서민원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서민원 후보자 추천 과정을 살펴보면, 보수당과 노동당을 막론하고 현역 의원이 있는 지역구에서는 현역 의원의 재공천이 당연한 일로 간주된다. 부적격 사유가 있더라도 '물갈이'는 주권자인 국민이 투표로 직접 할 일이지, 정당의 지도부가 임의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다만 현역 의원을 재공천하더라도 훌륭한 정치예비군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평소부터 부단히 이뤄진다. 4년마다 의원들을 대거 '물갈이' 하면서 외부 수혈을 급조해내기에 바쁜 우리 정당과는 대조적이다.

    보수당은 우리의 당원협의회에 해당하는 선거구협회(Constituency Association)에서 해마다 보수당의 서민원 후보가 되려는 뜻이 있는 예비후보군을 지역에서 공모해 면접을 본 뒤, 결과를 중앙당에 해당하는 전국연합(The National Union of Conservative and Unionist Association)에 제출한다.

    전국연합 산하 서민원의원선정위원회(Parliamentary Selection)에서는 선거구협회에서 올려보낸 면접 결과를 심사해서 예비후보자 명부로 작성해놓고 보관한다.

    현역 의원이 낙선해서 결원이 생기거나, 재선을 포기하는 등의 이유로 공천 사유가 생기면 이 예비후보자 명부가 꺼내진다. 예비후보자 명부를 중앙당으로부터 다시 전달받은 선거구협회에서는 선정위원회(Selection Committee)를 조직한다.

    매해 공모하며 오랜 기간 누적된 예비후보자 명단에서 선정위원회는 3명 이상을 선정해 선거구협회 집행위원회(Executive Council)에 상정한다.

    집행위원들은 이렇게 선정된 후보들을 상대로 물론 공식 면접도 하지만, 그보다 예비후보자와 배우자 내외와 함께 오찬·만찬과 문화행사 등을 함께 하며 비공식적 접촉을 깊게 가진다.

    이에 대해서는 공식 면접을 좌우하는 언변이나 연설 실력 등은 이후 실제로 정치활동을 하면서 충분히 숙련해나갈 수 있는 반면, 그 인물의 인·적성이나 과거 경력으로부터 비롯된 정치에 대한 식견과 관점은 고쳐질 수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과연 정치인으로 적합한지' 인적성 면접을 보는 셈이다.

    이같은 비공식적 면접을 통해 예비후보자들을 속속들이 파악한 집행위원들은 무기명투표를 진행한다. 특정 예비후보가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2인 이상을 선거구협회 총회(General Meeting)에 추천한다. 이후 해당 선거구협회의 당원들이 모인 총회에서 공식후보자를 선출한다.

    공천 사유 발생시 누적 예비후보자 명부 활용
    오찬·만찬·문화행사 등으로 심층면접 진행
    정치인 인·적성평가…한 번 뽑아 오래 공헌


    ▲ 제러미 코빈 노동당 총재를 지지하는 영국 노동당원들이 서민원 의사당 앞에서 코빈 지지와 보수당 규탄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노동당도 대동소이하다. 다만 보수당은 명망가 정당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개인 자격으로도 매해 이뤄지는 예비후보자 공모에 응할 수 있는 반면, 노동당은 계급 정당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조직이 상대적으로 중시되는 차이가 있다.

    노동당의 예비후보자 공모에 접수하려면 노동조합, 페이비언협회(Fabian Society·1884년 창설된 좌파 지식인 협회)나 선거구협회 지부(Branch)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공천 사유가 발생하면 선거구 집행위원회가 예비후보자 명단을 작성해, 대의원들로 구성된 총무위원회(General Committee)에 제출해 한 명이 과반득표를 할 때까지 투표를 반복해서 후보자 1인을 선출한다.

    노동당의 경우, 이렇게 해서 선출된 후보자는 중앙당 전국집행위원회에 제출돼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선출된 후보자가 노동당의 당적을 2년 이상 보유했다는 조건을 충족한 경우 지금까지 승인이 거부된 사례는 없다.

    결국 영국 양당의 공천 절차는 정당 지도부가 소속 의원에 대해 공천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르고 '인위적 물갈이'를 배제하는데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현역 의원의 헌법기관·대의대표로서의 지위를 존중하면서도, 평소에 끊임없이 예비후보군 그룹을 확보해두고 인·적성을 고려한 심층면접을 진행함으로써 한 번 선출했을 때 나라를 위해 오랫동안 공헌할 수 있는 정치인을 양성한다는데 의의가 있다는 분석이다.[데일리안 = 정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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